32페이지 내용 : 스스로 꾸짖는 노배우들의 격한 통탄과 한숨 또한, 나를 오래간 그들의 삶 주변에 묶어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여성국극의 역사적 사료라 할 만한 것들은 언제나 변변치 않았고, 다만 소량의 의미 있는 연구 논문을 길잡이 삼아, 생존 배우들의 구술에 거의 의존해 여성국극에 대한 연구와 해석, 연관된 창작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텅 빈 아카이브와 퇴색된 사진들, 훼손된 기억과 번복하는 구술 속에서 유의미한 이미지를 발견하고 구성하는 일은 어려웠지만 매 순간의 깨달음과 그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이 특별했기에, 또한 그 누구도 ‘정통성’의 권위를 강요하지 않았기에, 장르적 성역을 배타적으로 강요받지 않았기에, 그래서 상상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었기에, 더 많은 예술의 형태나 삶의 면면을 여성국극과 연루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창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여성국극의 주변에서 웃고 우는, 실패하고 성공하며 서성대는,15년 세월을 지나왔다. 소위 ‘정년이 효과’가 일궈낸 여성국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이제 어디를 향해야 할까? 모처럼 세상의 중심에서 ‘들릴 만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지금, 선생님들은 당신들이 “죽기 전에”, 여성국극이 “국가의 지원과 보존” 아래 들어가기를 바란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그 형태는 아마도 ‘국가무형유산’과 같은 권위의 이름 아래에서 ‘전통성’과 ‘영원성’의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유일한 여성국극의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형적인 역사 아카이브로서의 ‘국가무형유산’ 제정 사업은 소멸 위기에 처한 문화유산을 발굴·보호하는 일 이상으로 패권을 가진 문화에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그 패권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아카이브란 애초에 ‘선별’하기 위한 ‘배제’ 또한 자행해왔으며, ‘망각’에 저항하는 만큼이나 ‘망각’에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역할을 선도해오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짧지 않은 시간을 여성국극으로부터의 배움에 기거해 작업 실천을 하도록 이끈 것은 공식화된 역사나 정연한 아카이브의 권위 있는 사료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역사적 공백’, 혹은 ‘텅 빈 아카이브’ 앞에서 느낀 당혹감일 것이다. 드문드문한 자료 사이를 읽어내고, 모호한 기억 속에 개입하면서, 상실한 이들과 생존한 이들 사이의 대화를 상상하거나, 지워지고 사라진 그 공백을 정치화하면서, 나아가 패권적 역사 서술에 저항하고 퀴어링하면서15년이라는 시간을 역동적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정년이 를 포함해 여성국극을 소재 삼은 대부분의 창작물 또한, 바로 그 텅 빈 시공을 표류하며 감지한 저마다의 상상된 미래를 작품에 써넣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는 『아카이브 취향Le Gout De L’Archive』에서, ‘아카이브 취향’이란 바로 “표류의 취향”임을 밝히며 역사 서술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를 써야 하는 이유는 죽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과거를 이야기할 어법을 찾아내 “살아 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여성국극이 다만 ‘죽은 과거’로 불변의 기록과 닫힌 미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충분히 변화하고 생동하는 역사 해석을 무한히 열어두어야 한다.30
33페이지 내용 : 더 변칙하고, 더 균열 내고, 더 저항하고, 더 움직이도록 상상과 생산을 멈추지 않는 것. 변용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마법과도 같은 쾌락의 장소로서의 무대를 다시 발명하는 것. 그것이 내가 오래간 여성국극과 연루되면서 배우고 실천해온 역사적 어법이다. 정은영은 미술 작가로 비디오와 퍼포먼스를 주매체로 현대미술의 정치적 미학을 고안한다. 대표작으로 ‘동두천 프로젝트’ 2007-2009 와 ‘여성국극 프로젝트’ 2008- 가 있다. 여성국극 프로젝트 로 2013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2018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했다. 새 시대 왕자들의 귀환을 환영하며 장안의 화제인,1950년대 여성국극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정년이 는 최고 시청률16.5%를 기록하며 숱한 쇼츠를 남기고 종영했다. 동명의 원작 웹툰이 워낙 튼튼한 작품성과 두터운 팬층을 가지고 있어 드라마 제작 전부터 관심이 높았고,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연기력과 인기를 지닌 배우 김태리가 출연한다는 것으로 이미 큰 관심사가 됐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시청자들은 매우 낯선 여성국극에 호기심을 갖고 판소리와 창극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5편 넘는 창극을 쓰고 연출한, 심지어 바로 지난해에 창극 정년이 를 연출한 나에게도 종종 연락이 닿아 여성국극과 우리 소리를 향한 관심이 전해지기도 했다. 2023년3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린 창극 정년이 제작 기억을 되살려보겠다. 2022년 처음 국립창극단 프로듀서로부터 웹툰 정년이 를 소개받았다. 열렬한 독자라면서 나에게 일독을 권유하며, 국립창극단에서 창극으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의견과 함께. 물론 그간 국립창극단이 다양한 시도와 실험으로 지금의 창극 부흥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일단 나는 웹툰을 창극화한다는 말에 놀랐고,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웹툰이라는 데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국립창극단이 여성국극을 다루겠다고? 물론 국립창극단 초창기에 여성국극의 시초가 되는 여성국악동호회 주축 멤버인 김소희·박귀희 명창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대거 유입됐다. 그러나 국립창극단은 새로운 창극의 정립이라는 기치 아래 여성국극의 가치를 평가절하한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여성국극을 소재로 다룬 창극을 제작하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작업을 결정하던 때는 웹툰 정년이 의 연재가 끝나지 않은, 미완성 상태였다. 웹툰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나는 독자들의 댓글이 더욱 흥미로웠다. 무엇이 이렇게 젊은 세대를 열광하게 했을까? 이들이 여성국극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관심이 우리의 전통문화로 확산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쏟아졌다. 웹툰·드라마·창극에서 정년이 는 장르 특성에 따라서 약간의 변주가 생기기 나름이다. 그러나 공통으로 전쟁과 국가 재건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서로 경쟁하는 여성의 서사와 지금은 거의 사라진 특수한 예술 장르 ‘여성국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