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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페이지 내용 : 어두운 무대 위, 허리를 숙이고 잔뜩 웅 크린 무용수들이 한 덩어리처럼 뭉쳐 있 다. 이내 메트로놈처럼 반복적으로 흘 러가는 박자 속에 묵직한 현의 음색이 흐르기 시작하고, 무용수들의 몸짓도 기지개를 켠다. 마치 정직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씨앗이 발아해 새싹을 틔우 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봄의 생 동력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강렬하게 꽂 힌다. 음악과 딱 떨어지는 군무 구간에 선 무용수들이 동작을 수행하면서 내는 몸과 바람 사이의 마찰음까지 더해져 시 청각의 쾌감을 배가한다. 창작무용이 대사 없이 몸으로만 진행돼 난해하고 추 상적일 거라는 편견은 시작부터 산산이 깨진다. 떠오르는 현대무용가 겸 음악감독 김재 덕과 한국무용의 대가 국수호가 세종문 화회관 M씨어터에서 선보인 서울시무 용단 정기공연 사계 는 이렇게 첫 장면 부터 관객을 압도했다. 장르와 세대를 초월한 협업은 일찍이 기 대를 모았다. 두 사람은 각각 봄·여름 김재덕 , 가을·겨울 국수호 로 나눠 안 순환과 영원의 무아지경 글. 정주원 매일경제신문 문화스포츠부 기자 무를 맡았다. 그러면서도 별도의 두 작 품을 연달아 선보이는 ‘더블 빌’이 아닌, 연속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무대에 올 리는 방식을 택했다. 서로의 창작을 보 완하며 대본·연출·음악 모든 과정을 함 께 구상했다는 전언이다. 대본과 연출 엔 국수호, 음악엔 김재덕이 대표 제작 진으로 이름을 올렸다. 개성 강한 두 안무가의 협업은 언뜻 상 상하기 어려웠다. 36세의 나이 차, 서로 다른 장르라는 장벽에 더해 각자 작품 속에서 드러내온 철학과 스타일이 뚜렷 했기 때문이다. 국수호는 국가무형유산 ‘승무’ 이수자이자, 한영숙·송범·은방 초 등 전통 춤꾼들을 사사한 한국무용의 계승자다.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 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등 국가적 대형 행사에서 안무를 맡았고, 1996-2000 서울시무용단 국수호·김재덕의 사계 2024 ⁄ 10 ⁄ 31-11 ⁄ 03 | 세종문화회관M씨어터 34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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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페이지 내용 : 여름의 싱그러움 같은 비유는 없다. 생 명이 봄에 탄생해 겨울로 갈수록 점차 소멸해간다는 식의 단선형 구조도 피했 다. 관객은 그저 흘러가는 계절을 짐작 할 뿐이며, 그 과정에서 자연의 순환과 시간의 영원성이라는 섭리를 체감한다. 다만 국수호 안무의 서사성에는 명시적 이고 설명적인 부분도 있었다. 전반부 와 달리 후반부에 계절을 상징하는 전형 적인 요소가 종종 등장했던 터다. 높게 뜬 보름달 아래로 여자들이 모여 강강술 래를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가을 명절의 이미지가 드러난 대목이었 다. 이어 여성 부채춤 군무 중에는 가을 철새 기러기를 표현한 듯 무용수마다 머 리에 깃털을 달고 나왔다. 이들의 리드 미컬한 부채춤은 깃털과 어우러져 철새 의 날갯짓을 곧장 떠오르게 했다. 그럼에도 전반부와 후반부의 색깔 차이 가 작품이 의도한 메시지를 훼손한다고 까지 느껴지진 않았다. 뇌리에 남는 선 명한 장면들도 계속됐다. 겨울로 향하 면서는 남성 무용수들이 품과 소매가 넓 은 검은 장삼을 허공에 휘젓거나 바닥에 내리치는 장면으로 관객 몰입도를 높였 다. 절도 있는 몸짓 가운데 붓칠을 하는 년에는 국립무용단 단장을 지냈다. 춤 극 형식의 웅장하고 서사가 뚜렷한 작품 이 특징이다. 반면 김재덕은 추상성을 강조한 움직임 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현 대무용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힙합·팝 댄스 등 을 즐겨 추다가 16세에 대학 입시를 준 비하며 발레·한국무용·현대무용을 배 운 것으로 알려졌다. 재즈 가수인 어머 니는 물론, 서양음악에 한국적 특성을 결합하며 실험적 음악을 낸 가수 신해철 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 다. 자신이 안무에 쓰는 음악도 직접 만 든다. 2006년 초연한 다크니스 품바 로 국내는 물론 영국·스위스·브라질 등 세계 곳곳에 초청받았다. 종묘제례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찬사를 받은 서울 시무용단 일무 에도 안무가와 음악감 독으로 참여했다. 서로 다른 세계를 그려온 두 사람은 이 번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났다. 김재덕이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안무를 제안받은 후 ‘의미 있는 협업’을 먼저 제안했고, 국 수호도 흔쾌히 수락해 이뤄졌다고 한 다. 이후 작업 과정이 수월하기만 했을 리 없다. 이들이 남긴 짧은 작업 후기에 서도 얼마나 다른 세계가 만났는지 어렵 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김재덕은 “한국 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서사와 추상, 유 형과 무형 등 국수호 선생님과 제 밸런 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고 전했다. 국수호는 “내 춤이 고여 있지 않기를 바 라며, 더 젊어지고 싶어서 참여했다”면 서, “처음으로 내가 선택하지 않던 방법 으로 작업했다”고 했다. 다행히 두 세계의 충돌은 파국이 아니라 융합을 향한 도전으로 잘 발현됐다. 작 품은 분명 네 개의 계절을 다루지만, 명 시적으로 막을 나누거나 구태여 계절 사 이의 변화를 관객에게 알리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계절이란 소재가 뻔하지 않 고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사계절 의 오색찬란한 변화, 봄의 따스함이나 듯 혹은 날갯짓하는 듯 유연한 움직임도 섞였다. 전반부의 안무를 후반부에 변 용·반복해 하나의 작품을 일관성 있게 조직하려는 노력도 눈에 띄었다. 융합의 시도가 빛을 발한 또 다른 요소 는 바로 음악이었다. 김재덕이 그의 전 작들과 마찬가지로 직접 음악을 만들었 는데, 거문고·아쟁·대금·태평소·생황 등 전통 국악기의 라이브 연주에 빠른 리듬의 일렉트로닉 음악이 조화롭게 어 울렸다. 낯설지 않으면서도 진부한 느 낌은 없이, 세련된 방식으로 극에 힘을 불어넣었다. 무대는 단순하게 연출돼 음악과 무용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소품이나 미디어 장치를 최소화했고, 시각 장치 중에선 거의 조명으로만 무용수의 신체 움직임 을 부각했다. 무대 세 면도 멀리서 본 산 과 하늘의 풍경을 암시하는 선과 면으로 만 단순하게 꾸몄다. 극의 마지막에는 무아지경의 신명 나는 춤판이 벌어진다. 모든 무용수가 무대 를 꽉 채우고 소리까지 최고조에 달하다 가, 이내 음악이 멎고 무용수는 다시 한 덩어리로 모여든다. 어느덧 막이 오른 직후 봤던 웅크린 그 모습으로 돌아간 다. 끝이 시작이 되고, 시작이 다시 끝으 로 돌고 돈다는 동양적 사유가 직관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 review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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