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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페이지 내용 : ‘로미오와 줄리엣’이 원작인 ‘웨스트 사 이드 스토리’ 정도가 뮤지컬로 성공했을 뿐, 그동안 셰익스피어 작품의 재창작은 거의 금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안 된다고 말리면 어떻 게든 더 하고 싶어 하고, 못 한다고 코웃 음치면 무슨 수를 쓰든 해내고야 만다. 어쩌면 셰익스피어가 저승에서 가쁜 숨 을 몰아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 한 해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극 작가는 셰익스피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신유청이 연출하고 조승우가 주연 한 햄릿 이나 양정웅의 연출로 황정민 이 주역을 맡은 맥베스 처럼 원전에 충실하되 규모를 블록버스터급으로 키 운 셰익스피어 작품이 관객몰이에 앞장 섰다. 기발하게 재해석한 셰익스피어도 쏟아졌는데, 부새롬 연출은 이봉련 배 우를 앞세워 좌고우면하는 원작 캐릭터 의 레이어를 과감히 버리고 오직 정면 돌파하는 ‘여자 햄릿’을 만들었다. 농인 배우들이 수어로 연기한 연극 맥베스 는 스코틀랜드의 왕위 다툼을 정육점 집 안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피칠갑 난장으 로 바꿔놨다. 가장 최근엔 극단 창작조 직 성찬파가 맥베스가 왕이 될 거라 예 언한 세 마녀를 주인공 삼은 연극 마녀 들 를 무대에 올렸다. 원작의 결말 이후 겨우 숨만 붙어 있던 맥베스를 굳이 살 려낸 뒤 서로를 향해 끔찍한 비극의 책 임을 추궁하며 싸우게 했다. 그 모든 ‘셰익스피어’들이 아우성치는 와중에, 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 도 1년여 만에 재연으로 돌아왔다. 우리 연 극의 현재이자 미래가 될 작가 김은성 의 극본은 여전히 힘 있다. 작곡가 박천 휘는 신선한 장르 음악을 식재료로 파인 다이닝의 메인 디시를 내오는 셰프 같 다. 넘버들이 여전히 귀에 쏙쏙 박힌다. 이 뮤지컬은 두 번째 공연에서 우악스럽 게 이것저것 채워 넣는 뮤지컬의 시류로 부터 한 걸음 비껴 서기로 결심한 듯하 다. 초연 때 살짝 버거워 보인 몸짓 언어 와 스타일리시함을 내려놓자, 한결 더 간결하고 가벼워졌다. 초연에서 앙상블은 그리스비극의 코러 스 역할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였다. ‘레 이디 맥베스’로 불리다 이름을 부여받 은 ‘맥버니’와 남편 맥베스는 제 몫을 받 지 못했다는 박탈감, 기어이 왕좌를 찬 탈하고야 마는 권력욕에 몸을 뒤틀고, 씻기지 않는 피에 물든 손을 괴로워하며 죄책감에 비틀거린다. 코러스는 이들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었다 가, 금세 무대 위로 뛰어들어 극 중 인물 이 돼 움직이고 노래했다. 이는 악인이 주인공인 극에서, 관객이 인물 심리에 동화하지 않고 객관화해 바라보게 하려 는 장치로써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하 지만 셰익스피어 극의 특장인 감정적 약 동에 몰입하기 쉽지 않은 아쉬움도 있었 을 것이다. 새롭게 연출을 맡은 신재훈 연출가는 ‘오셀로’를 탈춤극으로 만든 오셀로와 이아고 , ‘리처드 3세’를 미국 뇌성마비 고교생 이야기로 각색한 연극 틴에이 지 딕 등을 연출한 바 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멕베스의 욕망보다 불안에 주목했다”며 “맥베스 하면 욕망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이번엔 맥베스와 아내 맥버니의 마음속 격랑을 들여다보려 했다”고 말했다. 대본을 그 대로 둔 채 관점을 달리해 새롭게 해석 한 것이다. 뮤지컬은 그토록 원했던 왕 관을 쓰고도 불안과 두려움에 괴로워하 는 맥베스와 맥버니의 얼굴을 더 가까이 다가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관객은 거 기서 목표 지향적인 성과주의 사회에서 만성적 우울을 안고 사는 현대인의 얼굴 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초연에서 앙상블 배우들은 줄곧 복잡한 동선과 몸짓 언어를 소화해야 했다. 차 가운 회색 석재 질감의 무대에 뚫린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은 마치 갖가지 감정 이 들끓는 맥베스와 맥버니의 머릿속이 거나, 음모와 살인이 난무하는 구중궁 궐의 비밀 장소 같았다. 앙상블 배우들 은 이 구멍을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더 다양한 정서적 결을 담을 수 있는 야심 찬 연출이었지만, 긴 대사와 심리 묘사 대신 압축되고 생략된 노래와 안무로 승 부를 봐야 하는 뮤지컬 무대에는 버거워 보이는 면도 있었다. 재연 무대는 과감히 덜어내는 쪽을 택했 다. 전쟁과 격투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장면도 크게 줄어 들었다. 새롭게 합류한 유회웅 안 무가는 앙상블 배우들이 과부하된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하고, 장면마다 메 시지를 담는 간결한 안무에 집중한 것으 로 보인다. 덕분에 배우들은 무대에서 훨씬 홀가분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송정은 영상 디자이너는 차갑고 미니멀 한 회색 무대에 맥베스와 맥버니의 마 음처럼 흔들리는 촛불 불빛을 입히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를 더 풍성하게 만 들었다. 셰익스피어 극에 대한 사전 지 식이 없는 관객도 인물의 마음에 더 쉽 게 공감할 수 있고, 장면 전환을 좀 더 쉽 게 이해할 수 있는 장치가 됐다. 재연 공연이 외부 배우 수혈 없이 온전 히 서울시뮤지컬단 단원으로 진행된다 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맥베스 역은 한 일경·허도영, 맥버니 역은 유미·이연경 이 더블 캐스팅됐다. 뮤지컬 팬들에게 낯익은 배우의 이름값 없이도 대극장 뮤 지컬이 쏟아지는 연말 시즌에 티켓 판매 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긍정적이다. 재연 무대의 맥베스 는 서울시뮤지컬단 레퍼토리로서 공연 자 체의 경쟁력을 보여주며 순항하고 있다. 서울시뮤지컬단 맥베스 2024 ⁄ 12 ⁄ 12-12 ⁄ 29 | 세종문화회관M씨어터 40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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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페이지 내용 :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얼굴을 보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review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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