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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페이지 내용 : 민경갑, 평생 젊음을 위한 ‘새로운 시도’ 글. 조상인 서울경제 백상경제연구원 미술정책연구소장, ‘살아남은 그림들’ 저자 사진. Studio Kenn 민경갑, 자연속으로 ,2001,99×76cm, 세종문화회관 소장 ‘공간에 깃든 예술품’ 연재 안내 N°05 | 박서보, 묘법No.24-77 ,1977 N°06 | 윤형근, 다청77 ,1977 N°07 | 윤명로, 균열77-1020 ,1977 N°08 | 최명영, 평면조건2105 ,2001 N°09 | 황영성, 가족이야기 ,2000 N°10 | 백남준, 월금 , 첼로 ,2001 N°11 | 김영중, 비천상 ,1978/1983 N°12 | 김봉태, 창문-2 ,2001 N°13 | 변종하, 영광과 평화 ,1978 N°14 | 이원좌, 화암군선도 ,1978 N°15 | 민경갑, 자연속으로 ,2001 ‘공간에 깃든 예술품’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간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막이 오르고 서서히 무대가 드러나 는 순간, 기대와 환호가 폭죽처럼 가 슴을 두드리는 그 순간을 꼭 닮은 그 림 하나가 세종문화회관에 있다. 전 부 드러내지 않은 어둑한 안쪽에서 빛줄기와 붉은 반짝임이 복작인다. 현대 한국 화단의 거목이었던 유산 酉山 민경갑1933-2018의 작품 자연속 으로 다. 화면을 반 이상 가린 흰 천 자락의 표 현이 몹시도 생생해 그림 위에 헝겊 이나 종이를 붙인 건가 싶어 유심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신비로운 분 위기의 그림이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작품에서 종종 나타나는 흰 깃발 형상에 대해 화가 민경갑은 생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산을 좋아해서 산을 타곤 하는 데 종종 성황당 한국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시는 사당 에서 쉬곤 했어요. 한번은 앉은 자리 주변을 살펴보다 나부끼는 천 자락이 눈에 들어왔어 요. 흰 천, 빨간 천이 이리저리 나부 끼는데 ‘여러 가지가 어우러져 현대 적인 바람이 되었구나’ 싶더니만 순 간 섬찟 가슴에 와닿는 게 있더라고 요. 이게 뭐지? 아, 그게 바로 한국적 인 것 아니겠는가. 그걸 승화시켜 작 품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민경갑은 피란 중이던 1953년 서 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입학해 1957년 졸업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동양화 혹은 한국화는 거장의 문하 생으로 들어가거나 사설 미술연구소 에서 ‘어깨너머로 배우던’ 시절이었 다. 민경갑은 대학 교육을 통해 체계 적으로 전통 한국화를 전공한 1세대 작가가 됐다. 대학생이던1955년 제4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國展 에 출품해 입 선했고, 이듬해 제5회 국전에서 시 청試聽 으로 특선을 받았다. 그해 특 선 수상자 중 최연소였다. 혈기 왕성 한 20대였다. 동양화로 ‘어떤 그림 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았 다. 일제 강점기 화단을 파고든 왜색 풍 채색화에서 벗어나야 했고, 아방 가르드 운동의 조짐을 보이던 서양 화단처럼 새로운 시도가 필요했으 며,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정체성 탐구도 절실했다. 민경갑은 1960년에 서세옥·정탁영 등 서울 대학교 동양화과 출신 젊은 작가들 과 의기투합해 묵림회墨林會를 결성 했다. 1964년까지 총 8회의 전시를 개최한 묵림회는 신선함을 잃어버린 한국화에 과감한 ‘추상’을 도입했다. 전통 회화의 현대화를 추구하며 먹 을 이용한 추상·반半추상의 실험 작 업을 이어갔다. 민경갑이 평생 젊은 화가로 산 원동력 중 하나였다. ‘추상 모색’이던 1960년대에는 무 엇을 그리느냐보다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추구하며 어떻게 보이느냐 에 대한 시각적 표현에 집중했다. 국 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1961년 작 생잔I 같은 작품은 의도적인 붓질 이나 묘사 없이 먹 그 자체의 번짐으 로 ‘그려진’ 것인데, 그 순수한 효과 가 60년 이상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 더라도 세련됐다.10년 뒤 그린 산 1971은 멀리 우직한 산을 두고, 앞쪽 으로 구름과 나무를 배치했다. 평범 한 듯하나 절대 평범하지 않은 그림 이다. 무리 지은 산은 추상적인 덩어 리요, 바람에 쓸려 휜 나무는 달음질 치는 것 같은 속도감을 보여준다. 민 경갑의 1970년대는 ‘전통 복귀’로, 산수·인물·화조 등 전통 소재를 여 러 기법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화 풍을 정립했다. 그는 ‘중진重鎭’ 소리를 듣던 46세가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 까지 해온 내 예술의 전모를 보여주 자”면서50여 작품을 내놓았고, 전통 적인 소재를 전통적 재료로 그리되 현대적 감각을 투영했다는 점에서 ‘새롭다’는 호평을 받았다.1980년대 중반부터는 수묵을 중심에 두되, 그 위에 채색을 더해 어둡고 무거운 화 면을 만들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밝은 색채를 쓰다가 중반에 이르러 눈부시게 화려한 원색을 사 용하기 시작해 민경갑의 ‘시그니처’ 를 만들어냈다. 이후 2000년대에는 자연의 형태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처리해 다양하게 조합하며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특히 ‘산’을 즐겨 그렸다. 대학 은사인 심산 노수현1899-1978의 영향 이 있다. 노수현은 오원 장승업의 화 풍을 계승한 조선 왕실 도화서의 마 지막 화원인 안중식·조석진에게서 그림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는 민경 갑에게 “산을 타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왜 산에 올라야 하나, 산으 로 들어가면 오히려 산이 보이지 않 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훗날 산을 거듭 오르고서야 깨달은 게 ‘산의 맥’ 이다. 미대생들이 해부학을 공부해 야만 인체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 할 수 있듯, 산의 맥을 알아야 제대로 산을 그릴 수 있다는 이치였다. “내 작품에 나타난 산의 모양은 특정 한 산일 수가 없다. 설악산이나 백두 산의 한 부분일 수도 있고 히말라야 의 어느 준봉일 수도 있다. 내가 그리 려는 산은 이러한 모든 산을 엮어서 새로운 하나의 산 모양을 창출해내 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외에도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등 여러 공공기관과 대형 건물에서 민경갑의 대작을 만날 수 있다. 그간 몰라서 안 보이던 그림이 알게 되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art in art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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