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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페이지 내용 : 백남준·마크 패츠폴 공동 작업, 보이스 보이스 스케치 ,1990, 그라프지에 연필 드로잉, 59×45.7cm 백남준, 보이스 보이스 ,1990, 레이저 디스크의2채널 컬러 비디오, 텔레비전 캐비닛, 펠트, 혼합 매체,265×188×95cm, 사진James Cohan Gallery 10 PIONEER OF THE KOREAN ARTS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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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페이지 내용 : 서울시뮤지컬단의 더 퍼스트 그레잇 쇼 는 최초의 한국 뮤지컬 제작 과정을 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극 중 창작진은 브로드웨이 출신 작곡가를 제외하고는 뮤지컬에 대한 경험이 전무 한 인물들로 구성되며, 잡지로만 뮤지 컬을 접한 작가, 다양한 스태프 역할을 전전한 연출가, 그리고 대중가수·오페 라가수·소리꾼·무당 등이 배우로 참여 한다. 이는 실제 예그린악단의 창단 과 정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당시 뮤지컬이 라는 장르가 국내에 뿌리를 내리기 전이 기에 다양한 전문가가 총동원됐다. 라미라가극단에서 음악부장을 맡았고, 일본 고마키 발레 문예부장을 거쳐 이 후 연극과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한 박용 구를 단장으로 임명했다. 문화부 기자 이자 시인 황운헌이 기획홍보실장, 미8 군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해 워커힐 호텔 악단장을 지낸 최창권이 음악실장이었 다. 일본에서 발레를 전공한 후 국립무 용단장을 지낸 임성남은 무용실장으로 참여했다. 이 외에도 합창 지휘 나영수, 한국무용 지도 한순옥, 연구조사실장 이진형 등 당대 최고의 엘리트 예술가들 이 한국 최초의 뮤지컬을 만드는 작업 에 동참했다. 이후에도 김희조·임영웅· 백성규·김백봉·한익평 등 음악·연극· 무용 분야 최고의 예술가들이 이 작업에 함께했다. 예그린악단은 약60명의 연기자와30명 규모의 관현악단으로 구성됐다. 1차 예 그린악단 출범 당시 인적 구성을 보면, 대학 재학생 또는 졸업자의 비율이 약 74%에 달했다. 전공별로는 음악 전공 자가 67%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무용 전공자가 18%에 이르는 등 예술계 고 학력 전공자들이 대거 참여했다.2차 예 그린악단 단원의 초임 월급은 10년 차 공무원 월급의 2-3배에 달할 정도로 높 은 수준이었다. 출퇴근 전용 버스까지 운영될 정도로 처우가 좋았다.1차 예그 린악단 시절부터 고액 월급이 이슈가 된 터라 예술대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의 관 심이 높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중예 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깊은 시기였기 에, 예술대 교수들 사이에서는 제자가 예그린악단에 들어갔다고 하면 ‘진로가 잘못됐다’며 안타까워하는 분위기였다. 성악·무용·오케스트라·쇼 밴드 등 다 엘리트 예술가가 대중예술에 함께할 때 장르 예술가들이 모이다보니 때로는 갈 등이 일어났다.1차 예그린악단 시절 박 용구가 연출로 참여해 합창단에게 간단 한 안무를 요청했을 때, 음악 전공자인 데 춤을 추는 것은 체면에 맞지 않는다 며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무용단원에 게 이브닝드레스를 주자 한국무용 전공 자로서 소매 없는 복장을 거부하기도 했 다. 합창단원이 타이츠 의상을 거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러한 일화는 2차 예그린악단 시절에도 이어졌다. 회식 자리에서 오케스트라 단원 상사인 지휘자가 권한 술잔을 거부 해 분위기가 냉랭해진 일이 있었는데, 이는 지휘자가 ‘딴따라’ 출신이라는 이 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순수예술 전 공자가 다수 포함된 예그린악단이 뮤지 컬을 만들면서 빚어진 갈등은, 한국 뮤 지컬이 자리 잡아가는 데 필연적으로 동 반된 성장통이었다. 명동 시절 국립극장에서 열린 예그린 팝스오케스트라 연주회 PIONEER OF THE KOREAN ARTS history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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