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페이지 내용 : 나는 마크 패츠폴이 생존해 있는 동안 그가 기억하는 백남준과의 모든 이야기 를 기록하고, 이 소중한 아카이브가 한 국에 영구 소장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1,400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정 리하고 국내 보존처를 확보하는 일은 결 코 쉽지 않았다. 2012년 12월, 마크와 미국의 판화가들의 도움으로 일부 기자 재를 서울로 옮겨 판화 연구소 ‘프린트 아트리서치센터Print Art Research Center’를 개소했다. 이후 10여 년간 백남준의 작 업에 사용된 프레스 장비를 신시내티에 서 하나씩 옮겨왔다. 마크와 함께 아카 이브를 정리하고 연구하며, 나는 백남 준이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제 작한 진화, 혁명, 결의 모음집을 시작 으로 백남준의 판화 작품을 수집하기 시 작했다. 솔웨이가 202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 지 그는 전시마다 백남준에게 받은 포스 터·사진·엽서·판화를 보내줬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아왔다. 피츠버그 앤디 워홀 뮤지엄을 방문한 뒤로는 백남 준의 유산을 반드시 수집해야 한다는 사 명감이 더욱 커졌다. 2023년, 마크는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 를 준비하며 공방을 정리하기 시작했 다. 미국의 여러 미술관에서 아카이브 구입을 문의해왔다. 이는 백남준의 귀 중한 아카이브를 하루빨리 한국으로 옮 기고, 널리 알릴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 기가 됐다. 그 결과,2024년 예술경영지 원센터 지역전시 활성화 지원 사업에 선 정돼 부산 도모헌에서 《백남준의 기록 된 꿈, 그 꿈과의 대화》 전시를 열고, 일 부 아카이브와 판화를 공개했다. 이어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로봇드 림백남준 팩토리 아카이브》 전시를 통 해 로봇 시리즈를 조명했다. 이는 국내 에서 열린 본격적인 백남준 아카이브 전 시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전시를 통해 아카이브는 국립현대미술 관에 소장됐고, 아카이브는 ‘마크 패츠 폴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돼 평생 에 걸친 기여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았 다. 이제 이 아카이브는 백남준 연구자, 학예사, 작가들이 함께 예술적 의미를 탐구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 소중한 자료가 미래의 ‘백남준 키드’를 길러낼 토양이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백남준 꿈의 기록인 아카이브를 한국으로 마크 패츠폴 Mark Patsfall, 1949- 판화가 마크 패츠폴은 백남준 생전에 비디오 조형 작품과 판화 제작에 참여한 중요한 인물이다.1981년, 미국 신시내티에 공방 겸 화랑인 클레이 스트리트 프레스를 설립하고 수많은 미술가와 협업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협력자는 단연 백남준이다. 두 사람은1983년, 백남준의 판화 제작을 계기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1990년대 후반까지 그는 미국 신시내티에서 수석 디자이너이자 테크니션으로 백남준의 작품 제작에 조력했다. 또TV와 비디오로 구성된 1986년 연작 로봇 가족Family of Robot 을 포함해 백남준의 다수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이들의 협업은1989년부터 ‘백남준 팩토리Paik Factory’로 불린 미국 신시내티의 작업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돼1990년대 후반까지 지속됐다. 백남준과 마크 패츠폴 ©Mark Patsfall 남천우·마크 패츠폴·칼 솔웨이의 모습 12 PIONEER OF THE KOREAN ARTSarchive
15페이지 내용 : 민간단체인 예그린악단이 다양한 분야 의 최고 엘리트 예술가들을 집결시키 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던 배경에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가 존재 했다. 1961년 12월 창단한 1차 예그린 악단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 필의 주도로 조직됐다. 흔히 예그린악 단의 탄생이 ‘북한의 피바다가극단에 필 적할 만한 단체’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시기적으로 부정확하 다. 혁명가극을 시도한 북한의 피바다 가극단은1971년에 창설됐다. 그럼에도 이 주장이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는 남북 간 정치 적 긴장이 극에 달한 시기로, 모든 문화 분야에서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당시 북한에서는 창극에서 대사 부분을 생략 한 민족가극이 유행했는데, 우리도 이 에 상응하는 문화를 계발해야 한다는 인 식이 존재했다. 박용구 단장 역시 “언젠 가 있을 북쪽과의 문화적 대결에서 뮤지 컬로 응하고 싶다. 북쪽에 없는 것이 재 즈의 활력일 것이므로, 그런 것을 담은 작품이라야 북쪽도 감명을 받을 것”이 라고 훗날 회고록에서 밝히며, 당시 문 화 정책이 남북 대결 구도를 염두에 두 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1970년 대에 접어들며 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남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문화사찰단 이 구성된다. 이때 북한의 대표적인 공 연단체 피바다가극단에 필적할 만한 공 연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역할 을 예그린악단이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1960년대 예그린악단의 탄생이 북한과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낸 산물이 라는 주장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 나 더 중요한 건, 정치적 혼란 속에서 권 력을 쟁취한 군사정권이 사회를 통합하 고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수단으로 대중 적이고 종합적인 예술을 활용하려고 했 다는 점이다.1차 예그린악단의 첫 공연 삼천만의 향연 1962이 독창과 합창·독 무·군무·관현악 연주로 이뤄진 총체극 이었던 것도 다양한 예술을 아울러 대중 이 즐기는 공연을 선보이고자 한 목적이 었다. 군사정권은 문화를 통해 대중과 더불어 민족정신을 고양하려는 문화 부 흥운동의 일환으로 예그린악단을 지원 한 것이다. 예그린악단의 추진에는 당 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의 역할이 지 대했다. 국가적 목표가 뚜렷했으나, 김 종필의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예그린악 단도 명운을 같이 했다. 정치적 바람에 운명이 흔들리다 1960년대 대춘향전 에 출연한 김성원과 패티김 1971년 방영된 예그린TV 뮤지컬 PIONEER OF THE KOREAN ARTS history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