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페이지 내용 : 백남준·마크 패츠폴 공동 작업, 삼원소를 위한 목업 ,1989 백남준, NJP@1800 RPMs ,1992, 레이저 디스크에 실크스크린 7개 오브제 중 일부 14 PIONEER OF THE KOREAN ARTSarchive
17페이지 내용 : 2차 예그린악단은 김종필이 공화당 의 장으로 돌아오면서 재창단됐다. 이는 군사정권의 민정 안정책의 일환으로 추 진된 조치였다. 이 시점부터 예그린악 단은 본격적으로 뮤지컬 전문 단체로서 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살 짜기 옵서예 를 성공적으로 초연했고, 이듬해 방송 드라마를 각색한 꽃님이 꽃님이 꽃님이 를 통해 동시대 이야기 를 코미디로 풀어내며 기술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대춘향 전 에서는 한국적 뮤지컬을 더욱 공고 히 하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좋은 성과를 냈지만, 1968년 3월에는 단장 이하 간부 전원의 사표를 요구하 면서 김경옥이 새로운 단장으로 임명됐 다. 이는 김종필 후원회장과 박용구 단 장 간 의견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 다. ‘예그린악단’에서 ‘예그린’으로 단체 명이 바뀐 것도 이때다. 김경옥 단장 체 제에서는 지역 순회공연이 활발히 이뤄 져 첫해에 전국 70여 개 도시를 돌며 공 연을 이어갔다. 이 시기의 예그린을3차 예그린이라 부른다. 박정희의 장기 집 올렸다. 1972년 단체는 문화공보부로 이관됐 다. 박용구 단장은 독자적인 운용권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임했 다. 뮤지컬 전용 극장을 꿈꾸며 다시 일 어선 5차 예그린은 또 그렇게 무너지는 가 싶었다. 박용구 단장은 떠났지만 문화공보부 이 종덕 차장 등 예술에 이해가 깊은 이들 이 지원을 약속하며 6차 예그린 시기가 시작됐다. 이후 1973년 장충동 국립극 장이 개관하면서 전속단체 국립가무단 으로 출범하게 된다. 굳이 분류하자면7 차 예그린이 열린 것이다. 1977년에는 ‘국립예그린예술단’으로 명칭을 바꾸며 예그린악단의 전통을 잇는 정체성을 명 확히 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세종문화 회관 준공과 함께 서울시 산하 세종문화 회관 전속단체로 이관된다. 단체의 명 칭도 ‘서울시립가무단’으로 변경됐다. 1970년대에는 오영진 원작의 ‘시집가 는 날’, ‘허생전’을 각색한 이런 사람-허 생 이야기 1977 등 우리 소재 뮤지컬 개 발을 이어갔다. 새마을운동 사례를 담 은 이 화창한 아침에 1975, 국난 극복의 의지를 담은 태양처럼 1976 등 정부 시 책을 반영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8년 ‘서울시립뮤지컬단’으로 개명 하고, 1999년 세종문화회관이 재단법 인으로 독립하면서 ‘서울시뮤지컬단’이 라는 현재의 명칭을 갖는다. 예그린악 단은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했지만, 한 국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이 땅에 뿌리내리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 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 에, 21세기 대한민국의 뮤지컬 르네상 스가 펼쳐진 것이다. 지금의 서울시 뮤지컬단이 되기까지 권에 반대한 김종필이 정계에서 물러나 면서 짧았던 3차 예그린은 1968년 말 해산됐다. 이후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뮤 지컬의 매력에 빠진 몇몇 단원들이 천호 동 화양리의 한 레코드사 2층에 연습실 을 마련해 ‘예그린기동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지속했다. 연출가 백은선이 기 동대장을 맡았으며, 단원 20여 명이 남 아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후원 없이 정식 뮤지컬을 올릴 만한 재정 여력이 되지 않았고, 민속무용·민요·합창 등으 로 위문과 순회공연을 펼쳤다. 이때를 힘겨운4차 예그린 시대로 본다. 1970년 11월, 박용구는 예그린기동대 를 인수하고 흩어진 예그린 멤버를 모 으기 시작했다. 새로운 중앙정보부장인 김계원이 후원을 약속하며 5차 예그린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박용구는 단체 를 재정비하며 자생력을 확보하고자 노 력했다. 1971년 동양방송과 제휴해 매 주 뮤지컬을 방영했고, 일본 NHK와 방 송 계약을 체결하는 등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했다. 김계원이 대만 대사로 전보 된 후 다시 위기가 찾아왔으나, 이후락· 김치열 등의 중앙정보부 인사들이 지원 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당시 남 북 교류가 물밑에서 시작되던 시기였 다. 남북 교류 문화 행사의 필요성에 따 라 다시 이 단체가 주목받으면서 정치적 인 후원이 이뤄진다. 이에 힘입어 1971 년에는 살짜기 옵서예 의 두 배가 넘는 예산을 투입해 장보고의 야망과 사랑을 담은 초대형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 를 예그린 시절 지붕위의 바이올린 과 서울시뮤지컬단 레퍼토리로 재탄생한 지붕위의 바이올린 PIONEER OF THE KOREAN ARTS history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