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페이지 내용 : 도쿄대학에서 미학을 배우며 아널드 쇤 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음악을 파고든 20대의 백남준. 그는 작곡가의 길을 걷 기 위해 1956년 독일로 떠났다. 그곳 에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 여름 학교Darmstädter Ferienkurse에 참가하게 되 는데, 이 경험은 그의 예술관에 큰 울림 을 줬다.1957년, 바로 그 다름슈타트에 서 백남준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을 처음 만 났다. 이후 백남준의 작업은 작곡을 넘 어 행위예술과 비디오아트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음악사에서 ‘독일 전자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슈토크하우젠. 그는 1951년에 먼저 설립된 프랑스 라디오 전자음악 스튜디오RTF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전자음악 실험을 빠르게 좇아 간 인물이다. RTF의 프랑스 작곡가 피에 르 셰페르Pierre Schaeffer는 1948년, 연주 자 없이 녹음된 소리만을 사용한 구체음 악Musique concrète을 정립했다. 슈토크하 우젠은 이 개념을 바탕으로 순수한 전 자음악 작품인 ‘Studie I·II’1953/54를 완 성했고, 나아가 사람의 목소리와 전자 음을 결합한 혁신적 작품 ‘Gesang der Jünglinge’1955/56를 통해 전자음악의 표 현 가능성을 한층 더 확장했다. 백남준은 슈토크하우젠의 전자음악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1958년에 는 그가 작업하던 쾰른 서독일방송 Westdeutsche Rundfunk의 전자음악 스튜디 오에 합류해 전자음악 제작 과정을 몸소 경험했다. 구체음악은 작곡가가 모든 음악적 요소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으 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음악이라는 특성을 보인다. 소음이나 특수 음향 등 기존 음악에서 배제되던 재료들도 폭넓게 수용한다. 스피커의 배치나 실제 연주자와 전자기기의 합주 처럼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재생 방 식도 가능하게 한다. 즉 악보 속에 갇힌 음악이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 살아 움 직이는 음악으로 확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쇤베르크 음악을 좇던 젊은 백남 준에게 슈토크하우젠의 파격적인 작업 은 더없이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테다. 슈토크하우젠의 전자음악은, 당시의 주 요 녹음 기법이었던 테이프를 직접 잘 라 붙이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백남준 은 쾰른 스튜디오에서 그의 작업을 직 접 보고 배우며, 이 기술을 익혔다. 그 결 과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테이프를 콜 라주한 Hommage à John Cage 1959 이다. 또한, 스피커 위치에 따라 달라지 는 음향의 변화를 체험하면서, 예술이 구현되는 공간 자체의 감각에 눈뜨게 글. 이의정 월간객석 기자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통제의 미학, 백남준을 흔들다 18 PIONEER OF THE KOREAN ARTS cooperative ©KathinkaPasveer
21페이지 내용 : 박용구朴容九, 1914-2016는 음악평론가, 무 용평론가, 연극 및 뮤지컬 작가, 연출가, 방송인 등 여러 직함을 갖고 다양한 분 야에서 활약한 예술가였다. 특히 우리 나라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 예 1966를 탄생시킨 주역으로서, 한국 적 뮤지컬 창작과 뮤지컬 전문 인력 양 성에 크게 기여했다. 1914년에 출생한 그는 일본 니혼대학에 서 미학과 성악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일본의 잡지사 ‘음악평론’에 기자로 입 사했다. 1940년대 초 귀국한 그는 라미 라가극단에 입단한다. 당시 반도가극 단·라미라가극단이 공연한 향토 가극 은 민속 소재를 기반으로 무용과 음악을 통해 극적 줄거리와 인물의 성격을 표현 했다. 이는 한국의 자생적 뮤지컬 혹은 본격 뮤지컬로 가는 전 단계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광복 후 박용구는 한국 최초의 음악 교 과서 제작에 참여했고, 1950년대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마키小牧 발레의 문 예부장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 초 귀 국한 그는 예그린악단의 뮤지컬에 가까 운 공연 여름밤의 꿈 1962의 구성과 연 출을 맡으며 한국 뮤지컬 운동에 본격적 으로 뛰어들었다. 예그린악단은 북한의 화려한 가무극에 필적할 가무단을 조직 하겠다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뜻에 따라 조직된 단체였다. 정치적 목적 아 래 창단된 예그린악단은 후원 권력자의 부침에 따라 해산과 재창단을 반복하기 도 했다. 뮤지컬 불모지였던 1960년대, 예그린 악단이 ‘한국적 뮤지컬’ 창조라는 목표 를 세우고 뮤지컬 전문 단체로서 성장 한 데는 박용구의 공헌이 컸다. 1966년 예그린악단장으로 취임한 그는 뮤지컬 토착화를 위해 고전에서 소재를 발굴하 고, 전통음악과 춤을 서구적 양식으로 현대화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는 고전 ‘배비장전’을 소재로, 김영수 극본 ·임영웅 연출 ·최 창권 작곡 ·임성남 안무 등 당대 유수 의 창작진과 함께 만들었다. 가수 패티 김과 코미디언 곽규석이 주연을 맡았 고, 총 3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출연진 이 무대를 꾸몄다. 당시 개발된 ‘예그린 창법’은 뮤지컬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하 는데, 벨칸토 창법과 판소리 발성을 절 충한 방식으로 가사 전달력을 높였다. 열악한 시민회관에서 공연했지만, 흥행 에 성공하며 그해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박용구는 성악·무용 등 각 분야 전공자로 구성된 단원들을 노래·춤·연 기까지 소화하는 다기능 배우로 훈련했 다. 뮤지컬의 발전을 위해선 전문 배우 와 제작진 양성이 필요하고, 나아가 전 용 극장과 전문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누 구보다 먼저 인식한 선구자였다. 글. 김성희 연극평론가 박용구 ‘한국적 뮤지컬’의 선구자 PIONEER OF THE KOREAN ARTS artist 19©강태욱/월간객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