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책갈피 추가
페이지

22페이지 내용 : 된다. 이러한 인식은 곧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SinfoNiE FoR 20 Rooms 1961 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20 개의 방에서 녹음된 테이프를 재생하 거나, 연주자가 직접 소리를 내고, 심지 어 살아 있는 동물을 풀어놓아 자연스 러운 소리를 유도했다. 어떤 방에는 식 초를 냄새를 가득 채우고, 또 어떤 방에 는 뜨거운 난로나 강풍을 틀어 청각뿐 아니라 후각과 촉각까지도 자극하는, 오감을 위한 음악 경험을 시도했다. 비 록 초연 당시 이 작품의 전체 버전은 실 현되지 못했지만, 2년 뒤인 1963년 개 인전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1963에서 일부 시연되며 주목 받았다. 이 작품 이후, 백남준은 정밀한 통제를 기반으로 한 전자음악과 구체음악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예술의 흐름을 관객에게 맡기는 존 케이지John Cage의 우연성음악Aleatoric music에 매력 을 느꼈고, 이에 따라 슈토크하우젠과 의 예술적 연결은 자연스럽게 희미해졌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기기를 창 작 도구로 삼는 발상은 그의 작업 전반 에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을 조작하며 음악을 구성하 는 슈토크하우젠의 미학은 백남준 사유 방식의 뿌리가 됐다. “내 인생은 1958년 8월 어느 저녁에 다 름슈타트에서 시작됐다. 1957년이 기 원전BC 1년이다. BC 1년은 곧 Before Cage 1년이다.” 백남준 1958년, 백남준은 다름슈타트 국제현 대음악 여름학교Darmstädter Ferienkurse에 서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를 처음 만났다. 그는 케이지를 스승으로 삼았 고, 이후 케이지의 예술 철학은 백남준 의 창작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대 표적인 예로, 케이지에 대한 존경이 제 목부터 드러나는 Hommage à John Cage 1959가 있다. 존 케이지의 영상 이 새장Cage 속에서 재생되는 Cage In Cage 1990는 그에 대한 연작 중 하 나다. 또한, 국내에 잘 알려진 백남준 작품 중 하나인 Good Morning Mr. Orwell 1984에도 케이지가 등장한다. 세종문화회관 《로봇드림백남준의 팩 토리 아카이브》 전시에서도 케이지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TV로봇 조각 시리즈를 다시 판화로 옮긴 Evolution, Revolution, Resolution 1989 중 ‘David’, ‘Voltaire’에는 케이지에 관한 시각을 적 었으며, ‘sonataⅠ’을 비롯한 다수 작품 에 케이지 음악의 핵심 개념인 ‘선禪, Zen’ 사상이 등장한다. 케이지와 백남준을 잇는 두 개의 키워드 는 ‘행위예술’과 ‘우연성’이다. 백남준의 첫 행위예술 작품이자, 독일 예술계 데 뷔작인 Hommage à John Cage 를 보 자. 뒤셀도르프에서 선보인 이 작품은 공연 전까지 단순히 녹음테이프로 만든 전자음악으로만 알려졌지만, 공연 당일 에는 계란을 던지고, 폭약을 터뜨리고, 피아노를 부수는 등 예상을 뛰어넘는 행 위로 구성됐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 건 자체가 작품이었던 이 공연은 호평을 받진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쾰른 공연 기회를 얻었다. 아울러 당시 실험 예술의 중심에 있었던 플럭서스Fluxus 그 룹에 합류하게 된다. 플럭서스는 1960년대 활발히 활동한 국제적 예술 공동체로, ‘끊임없이 변화 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존 케이지 외에 도 일본의 미디어 아티스트 오노 요코 Yoko Ono, 독일의 설치 예술가 요제프 보 이스Joseph Beuys 등과 함께 백남준도 이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 단체 는 기존 형식을 해체하고 과정을 중시하 존 케이지 우연이 만든 예술의 전환점 글. 이의정 월간객석 기자 20 PIONEER OF THE KOREAN ARTScooperative

페이지
책갈피 추가

23페이지 내용 : 최창권崔彰權, 1934-2008은 한국 뮤지컬음 악의 개척자이자 창작뮤지컬 대중화에 크게 공헌한 작곡가이다. 서울대학교 작곡과를 중퇴한 그는 1953년 재즈 스 타일의 악단을 조직하고, 군악대를 거 쳐 미8군 무대에서 피아노와 색소폰을 연주했다. 1960년대엔 워커힐악단의 단장으로 지휘자로, 또 대중음악의 작· 편곡자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가 본격적으로 뮤지컬음악에 발을 들 인 것은 1966년,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의 작곡을 맡으면서부터다. 뮤 지컬의 생명은 음악에 있고, 음악의 생 명은 신선하고 강렬한 리듬에 있다고 생 각한 박용구 단장은 최창권이 지휘하던 워커힐 쇼의 재즈밴드 음악을 듣고 작곡 을 의뢰했다. 살짜기 옵서예 의 음악 은 서도민요에 바탕을 둔 민속 선율과 라이트 뮤직 경음악 , 오케스트라 및 타 악기 연주를 결합해 한국적 뮤지컬로 평 가받았다. 그는 민속 가락을 현대적 어 법으로 재해석해 서양 뮤지컬의 경쾌함 을 우리 리듬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전 통음악과 재즈를 연결하고, 주제가와 넘버는 부르기 쉬워 대중에게 호응을 얻 었다. 특히 주연을 맡은 패티김이 부른 곡은 음반으로 선공개되며 흥행에도 기 여했다. 한편, 박용구는 한국적 뮤지컬을 창조 하는 중에도 예그린 산하 무용단을 훈련 해1967년 한국 발레사상 처음으로 백 조의 호수 전막 공연을 올렸다.1971년 에는 남북 문화 경쟁과 해외 순회를 목 표로 대형 사극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 박만규 극본 ·박용구 가사 ·최창권 작곡 ·백성규 안무 를 공연했다. 장보 고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세계적 수준의 뮤지컬로 호평받았다. 박용구 재임기의 예그린은 한국적 뮤지 컬의 창조, 뮤지컬 대중화, 뮤지컬 전문 인력 양성에 주력했다. 그는 뮤지컬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전용 극장 설립과 재정 자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다각도로 노력했으나, 정치적 외풍에 쉽게 흔들린 예그린의 한계로 인해 끝내 실현되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음악 및 무용평론, 뮤지컬과 연극 대본 집필,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 막식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유니버설발 레단 심청 1986의 대본을 맡았다. 국립 발레단 바리 1998에선 대본과 연출을 모두 담당하기도 했다. 다양한 예술 분 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그는 탁월한 기억력과 통찰력으로 예술계에 대한 증 언과 고견을 담은 인터뷰와 구술 자료를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 창작뮤지컬이 눈부신 발전 을 이룬 데는, 뮤지컬 태동기에 서구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 한국 고전 과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통해 토착화를 실현하고자 한 박용구의 비전이 큰 역할 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 김성희 연극평론가 최창권 우리 땅에서 뮤지컬음악을 개척하다 PIONEER OF THE KOREAN ARTS artist21

파일 다운로드

탐 색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