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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페이지 내용 : 는 예술을 추구했다. Hommage à John Cage 는 이런 맥락에 잘 부합하는 작품 이다. 1960년 쾰른에서 공연한 Etude For Piano Forte 에서는 백남준이 쇼팽 을 연주하다 피아노 위에 뛰어오르고, 무대 위에서 케이지와 싸우는 장면을 연 출하고, 피아니스트 머리에 샴푸를 뿌 리는 등 파격적 행위를 선보였다. 이 공 연은 백남준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 는 퍼포먼스로 가장 회자하곤 한다. 이러한 공연 활동을 통해 둘의 예술적 접점은 점차 깊어졌다. 케이지는 자신 의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삼았던 우 연성Aleatoric을 백남준에게 전했다. 이 는 무분별한 상태를 그리고, 의도와 목 적을 지양하는 선불교의 선禪에서 출발 한 시각이다. 이를 반영한 우연성음악 Aleatoric music은 작곡가조차 예측할 수 없 는 요소들이 작품에 개입하는 방식을 말 하며,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와 같은 실험적 기법과도 연결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케이 지의 대표작 ‘433’1952이다. 이 작품에 서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 정해진 시간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침묵하는 동 안,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공연장 내의 기침, 숨소리, 의자 삐걱거림, 바깥소리 등 그 순간에 우연히 발생하는 소리 그 자체다. 즉, 이 작품의 핵심은 음악이란 반드시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귀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될 수 있 다는 깨달음에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소리와 침묵, 음악의 본질에 대한 새로 운 인식을 얻게 된다.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 1933-1991 과 백남준.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 터 각자의 내면에 잠재된 혁신적인 면모 를 한눈에 알아봤을까. 1964년 뉴욕 아 방가르드 페스티벌New York Avant Garde Festival에서 만난 그들은 곧바로 협업을 시작했다. 조각·공연·음악 등 다양한 예술을 융합한 둘의 작업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그 결과 백남준은 ‘비디오아 트의 아버지The Father of Video Art’로, 무어 먼은 ‘새로운 음악의 잔다르크The Jeanne d’Arc of New Music’로 떠올랐다. 일본과 독 일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백남 준과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미 국 심포니 오케스트라American Symphony Orchestra에서 첼로 연주자로 활동한 무 어먼. 이들을 연결한 것은 바로 아방가 르드 정신이었다. 관습에 저항하고 미 적인 혁신을 추구했던 둘의 전위성前衛性 이 이들의 협업을 가능케 한 셈이다. 1967년 2월, 뉴욕의 한 시네마테 크에서 무어먼은 백남준의 Opera Sextronique 를 공연했다. 누드로 첼로 를 연주한 이 과감한 퍼포먼스는, 진지 함을 이유로 성性을 배제해온 클래식 음 악의 흐름을 반대하는 백남준의 급진적 아이디어와 맞닿아 있었다. 공연 도중 무어먼은 사복 경찰에 체포돼 음란 노 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 사 건은 뉴욕 예술계의 여론을 움직여 예술 도쿄대학에서 유학하며 불교에 관심을 가진 백남준은 선 사상을 자신의 작품에 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의 많은 작 품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그 순간 의 우연성에 따라 달라지는 열린 구조를 지닌다. SinfoNiE FoR 20 Rooms 1961 역시 각기 다른 20개의 방에서 다양한 감각 자극에 따라 반응이 끊임없이 달라 지는 작품이다. 또한, 피아노의 현을 모 두 제거한 뒤, 건반에 다채로운 장치를 연결해 조명·사이렌·녹음기 등 외부 장 치를 작동하게 한 독특한 프리페어드 피 아노 작품 Klavier Integral 1963 역시 케이지의 아이디어를 적극 계승한 작업 이다. 이 작품의 스케치는 이번 전시에 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젊은 백남준은 케이지의 실험적 기법을 유연 하게 흡수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점 차 확장해나갔다. 샬럿 무어먼 관습에 저항한 아방가르드 화신 글. 강지영 음악학자 22 PIONEER OF THE KOREAN ARTS cooperative 쾰른WDR Begegnung Mit Korea 콘서트에서의 샬럿 무어먼,1980, 에릭 안데르시 컬렉션,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아트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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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페이지 내용 : 최창권은 김희조와 더불어 예그린의 전 속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 는 꽃님이 꽃님이 꽃님이 1967, 바다 여 말하라 1971 등을 작곡했다. 대형 뮤 지컬인 바다여 말하라 에서는 50인 편성의 관현악단과 각국의 장면에 맞춘 음악적 색채를 접목해 찬사를 받았다. 예그린의 뒤를 이은 국립가무단에서 발 표한 뮤지컬 이 화창한 아침에 1975에 서는 전자음악과 록을 결합한 새로운 시 도를 보여줬다. 1970년대 중반은 대중 정서와 문화적 취향이 변화하던 시기 로, 미국 록 음악이나 뮤지컬영화가 인 기를 끌었다. 최창권도 미국 체류 중 브 로드웨이 뮤지컬에서 록이 주류가 된 흐 름을 직접 체감하고 귀국해 음악적 방향 을 전환했다. 한편 그는 동양방송의 TV 뮤지컬 음악 도 맡아 이를 계기로 극단 현대극장과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개척했다. 보물 섬 1977, 백설공주 1978, 프란다스의 개 1978, 요술피리 1986, 피터 팬 1991 등은 팝 스타일 음악으로 어린이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1세대 뮤지컬 작곡가인 최창권은 1975 년 창작뮤지컬 부흥을 꿈꾸며 사재를 들 여 뮤지컬센터 미리내를 창단하기도 했 다. 미국 브로드웨이를 다녀온 후 국내 뮤지컬이 발전하려면 인재 양성이 필 요하다는 생각에 결심한 것이다. 2년간 배우 교육에 전념했고, 1978년 세종문 화회관에서 자신의 대표작 살짜기 옵 서예 를 창단 공연으로 올렸다. 출연자 120명, 악단 50명이 참여한 대형 무대 였다. 예그린악단 초연과 달리, 전 출연 자가 움직이며 노래하는 등 서구적 뮤지 컬 기법을 녹여냈다. 다음 해엔 창작뮤 지컬 땅콩껍질 속의 연가 로 전국 순회 공연을 펼쳤다. ‘디스코 뮤지컬’이란 부 제답게 전체 음악이 록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미리내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 해1980년 해산했다. 최창권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서 울시립가무단의 3대 단장으로 재임 하며 우리들의 축제 1981, 나 어딨 소? 1982, 사랑은 물이랑 타고 1983 등 을 작곡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디스코· 록·국악·팝·세미 클래식 다양한 장르 를 아우르며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색채를 띠었다. 이후 그는 서울예술단 에서 지하철의 연가 1987, 영혼의 노 래 1991, 갈길은 먼데 1992, 꿈꾸는 철 마 1992, 징게 맹게 너른 들 1994 등의 음악을 담당하며 극의 주제와 인물의 성 격을 음악적으로 선명하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아들 최명섭 작사 · 최귀섭 작곡 과 협업한 심청 1997은 ‘스포츠조선’ 뮤지컬 음악상을, 그가 전 담 작곡한 한네의 승천 1997은 대상을 받으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 받았다. 최창권은 30여 편의 뮤지컬에서 전통 음악의 현대화, 즉 재즈·록·팝·디스코 등 다양한 장르의 융합을 시도했다. 작 품 소재에 맞춰 한국적 뮤지컬과 서구적 감각의 뮤지컬을 넘나든 그는, 한국 뮤 지컬음악의 기반을 닦은 진정한 선구자 였다. PIONEER OF THE KOREAN ARTS artist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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