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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페이지 내용 : 플럭서스 정신은 예술을 관객의 삶 속으 로 끌어들여, 누구나 창조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밀려오 는’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플럭 서스Fluxus는 ‘유동, 흐름, 끊임없는 변화’ 등을 의미한다. 기성 예술에 대한 고정 된 관념을 거부하며 실험적이고 전위적 인 예술을 시도한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일상성과 즉흥성을 주요 기반으로 삼았 다.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삶처럼, 한계를 두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예술의 재료로 활용했다. 삶 속에서 우 연히 발생한 사건을 그대로 예술로 옮기 거나, 복잡한 음악 기호 대신 일상 언어 로 된 악보를 만들어 경계를 허물었다. 1960년대 후반, 도시계획가로도 활동 했던 머추너스는 낡은 다락방 건물을 개 조해 플럭스하우스Fluxhouse라는 이름의 예술가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 조합 은 소호 지역의 재생과 고급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그는 ‘소호의 아버 지’로 불리게 된다. 소호는 이때부터 현 대미술 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며 번성했다.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던 머추너스는 1977년 췌장암과 간암을 진단받았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사망 3개월 전, 친구이자 동료였던 시인 빌리 허칭 Billie Hutching과 소호의 한 다락방에서 플 럭스웨딩Fluxwedding을 올렸다. 머추너스 의 삶은 순간순간 요동쳤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낡은 사고와 기존의 틀을 넘어 서고자 했다. 그는 진정한 플럭서스 운 동가였다. 1981년, 백남준은 절친한 동료였던 머 추너스를 기리며 그를 형상화한 로봇 작품 George Maciunas 를 선보였 다.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치 며 부수는 퍼포먼스 형식의 공연이었 다. 이듬해에는 요제프 보이스와 함께 In Memoriam George Maciunas 1982 를 발표하는데, 나무 막대기로 만든 작 은 원초건반Urklavier을 사용해 두 사람의 2중주를 담았다. 일상과 예술 사이의 간 극을 인식하고, 그 둘의 완전한 통합을 꿈꾼 머추너스. 그의 아이디어와 예술 적 실천은 오늘날까지 예술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0-70년대를 이끈 전위예술 운동, 그 중심에 있던 공동체 플럭서스Fluxus의 창시자는 조지 머추너스Jurgis Mačiūnas, 1931-1978이다. 그는 분명 전통적 의미 의 예술가는 아니었다. 머추너스는 196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처음으로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페스티벌FluxusInternationale Festspiele Neuester Musik을 개최 하며 플럭서스 그룹을 공식적으로 출범 시킨 리더였다. 백남준·요제프 보이스 Joseph Beuys·오노 요코Yoko Ono·조지 브 레히트George Brecht·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등 당대 예술가들을 연결하고 조 력하며 자극제가 돼준 인물이기도 하 다. 즉, 그는 독창적이고 미적인 작품으 로 예술사에 기여했다기보다, 자신이 수행한 활동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 가’,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 머추너스는 그래픽과 시각예술·건축을 전공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플럭서 스 내부에서는 예술가들의 작품 패키지 와 포스터 디자인을 담당하며, 이 운동 에 시각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 다. 그가 제작한 플럭스키트Fluxkit는 여 러 예술가의 오브제를 하나의 상자에 모 은 것인데,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열 어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된 일 종의 ‘여행용 예술 키트’였다. 한편, 그는 자신의 플럭서스 작품에 서명이나 고유 번호를 붙이지 않았는데, 이는 예술가 로서의 위계를 거부하고 ‘무엇이든 예술 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 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조지 머추너스 플럭서스를 움직인 중심축 글. 강지영 음악학자 행위에서의 누드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무어먼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이후 백남준은 무어먼을 위해 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와 TV Cello 1971 등을 제작했다. TV Bra for Living Sculpture 는 무어먼의 벌거벗은 가슴 에 두 개의 작은 텔레비전을 부착하고 연주하는 퍼포먼스다. 백남준은 TV를 브래지어처럼 사용하는 것을 보여주며 급속히 발전하는 전자 매체를 인간화하 고자 한 예술가의 고민을 드러냈다. 즉, 새로운 상상력과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 술을 다루는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백남준의 예술적 뮤즈였던 무어먼은 여 성으로서 자신의 몸을 적극 활용했다. 이에 따라 그의 나체가 남성 예술가와의 협업 과정에서 철저하게 타자화됐다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매혹적인 여성의 몸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를 전복시키는 행위 로 평가되며 찬사를 받기도 했다. 두 사람의 협업은 로봇 프로젝트에서 도 이어졌다. 백남준은 기술자 아베 슈 야Shuya Abe와 함께 20채널 원격 제어 로 봇 Robot K-456 1964를 개발했다. 이 로봇은 팔을 흔들며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뉴욕으로 건너 간 백남준은 자신이 직접 이 로봇을 조 종하며 거리를 걷고, 무어먼은 그 옆에 서 첼로를 연주했다. 이 장면은 영상 작 품 Robot Opera 1964에 담겼다. 거리 에서 펼쳐진 즉흥 공연은 예술이 고고한 성벽에 갇힌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우 연한 사건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줬다. 1970년대 후반 유방암 진단을 받은 무 어먼은 유방 절제술과 항암 치료를 받으 면서도 공연을 계속했으나, 결국 1991 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남 준은 그의 치열한 삶과 실험 정신을 기 리며 영화 Topless Cellist 1995를 제작 했다. 무어먼의 공연 기록과 함께 가족· 친구·동료들의 인터뷰가 담긴 이 영상 은 시대를 앞서간 전위예술가 샬럿 무어 먼에 대한 백남준의 진심 어린 헌사이자 애틋한 추모다. 24 PIONEER OF THE KOREAN ARTScoope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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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페이지 내용 : 한국 창작뮤지컬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 긴 작곡가 김희조金熙祚, 1920-2001. 그는 전통음악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일관되 게 추구했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동 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김희조는 이후 은 행원으로 일하며 피아노·바이올린·비 올라를 배웠고, 작곡에 대한 소양을 쌓 았다. 1945년부터 직업 연주자로 활동 하다가 1948년 군악대에 임관해 군가 와 행진곡을 작·편곡하면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대학 전 임 강사, 오케스트라 지휘자, 라디오 음 악 작업을 병행했다. 우리 민요를 채집 해 서양 오케스트라 편성의 합창곡으로 재구성하고, 국악과 클래식 음악 협주 곡도 창작하며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음악을 실현했다. 그는 1962년 삼천만의 향연 에 김생 려와 함께 전속 관현악단 지휘자로 참여 하며 예그린악단과 인연을 맺었다. 그 리고 1968년 대춘향전 의 음악을 맡 으며 뮤지컬 작곡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 였다. 이 작품은 한국적 선율과 리듬 위 에 서양 오페라 기법과 미국식 리듬을 절충해 극적 표현을 살렸다. 대춘향전 은 한국적 뮤지컬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 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국립가무단 국립예그린예술단 이 세종문화회관 전속단체로 이관돼 서울 시립가무단으로 재출범하자, 김희조는 초대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며 전통의 현 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전 통 선율 속에 서구 리듬을 안배하는 방 식으로 한국적 뮤지컬 정립에 힘썼다. 서동 설화를 소재로 한 달빛 나그네 1978 외에도 번역 뮤지컬 돈키호테 1979 , 지붕위의 바이올린 1985 등 작품 의 편곡을 맡았다. 그의 대표작 대춘향 전 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성춘향 으 로 작품명을 바꾸고 현대적 감각을 더해 여러 차례 공연됐다. 특히 1986년 아시 안게임 문화예술축전으로 기획된 양 반전 은 관객의 엄청난 호응을 끌어냈 다. 이듬해 미주 순회공연에서도 인기 를 끌며 세계적 수준의 뮤지컬이란 평을 받았다. 한국 전통의 가무악을 사용했 고, 국악·디스코·전자음악·서양 관현 악이 어우러져 서구인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는 반응이었다. 이외에도 88예술단의 뮤지컬 아리랑 아리랑 1988, 고향의 민들레 1990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뮤지컬 외에도 국립무용단 무용극 심청 1975, 국립발레단 창작발레 처 용 1981 등의 음악을 작곡했다. 1960- 70년대에는 60편 넘는 영화음악을 작 업하며 폭넓은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1982년부터 1999년까지 국악관 현악 합주곡 11곡을 발표하며 창작국악 에도 공헌했다. 김희조는 최창권과 함께 한국 창작뮤지 컬의 기틀을 닦았다. 최창권이 전통음 악의 현대화로 시작해 점차 서구음악의 비중을 높이며 한국적 뮤지컬을 진화시 켰다면, 김희조는 전통의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 서구 리듬을 유연하게 접목해 우리 정체성을 지닌 뮤지컬음악을 구축 해냈다고 할 것이다. 글. 김성희 연극평론가 김희조 전통과 현대를 넘나든 작곡가 1973년,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과 함께 예그린악단은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 립가무단으로 개편됐다. 초대 단장을 맡은 김희조는 ‘한국적 뮤지컬의 완성’ 을 목표로 삼았다. 제1회 공연으로 대 춘향전 을 무대에 올리면서, 우리 가락 을 뮤지컬에 자연스럽게 도입할 방법을 고민했다. 마침내 그는 서양 관현악 편 성에 전통 가락의 본질을 깊이 녹여내는 방식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며 뮤지컬 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 어진 작품 시집가는 날 1974에서도 희 극적 요소를 강조하며 서양음악과 우 리 가락의 융화를 시도했고, 현대물 상 록수 1975에서는 양악기와 국악기의 합 주, 한국적 선율을 서구적 기법에 담아 냈다. 그는 한국적 뮤지컬의 성패를 가 름하는 요인이 전통음악의 현대화에 있 다고 봤다. PIONEER OF THE KOREAN ARTS artist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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