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페이지 내용 : 워킹 매드, 벽 너머 감정의 여정 작품은 먼저 무용수들의 익살 스러운 움직임으로 관객을 웃 게 한 뒤, 감정을 급격히 반전 시켜 깊은 감동을 끌어낸다. 이 러한 급격한 전환을 통해 전달 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마치 인생처럼, 작품이 어떤 방식으 로든 감정의 여정이어야 한다고 본 다. 그래서 웃음, 눈물, 사랑, 폭력 같 은 여러 감정을 사용하는 걸 선호한 다. 워킹 매드 는 순진한 세계에서 출발해 의문으로 가득 찬 세계로 향 하는 여정이다. 라벨 ‘볼레로’는 종종 성적이고 의례적인 맥락으로 쓰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 으로 해석했다. 맞다. ‘볼레로’는 클리셰처럼 성적으 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그 런 방식은 원치 않았다. 물론 성性 사 이의 긴장을 다루긴 한다. 인정을 갈 구하는 젊은 소녀, 자신과 타인을 파 괴적으로 대하는 여성, 도약을 두려 워하며 미지로 나아가는 걸 망설이 는 또 다른 여성 같은 인물들이 그 주 역이다. 2001년에 제작된 작품을 2025년과 비교할 때 안무나 무대 표현에 변화가 있나? 작 품이나 안무 스타일은 시간과 함께 어떻게 진화했나? 내 안무는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도 전에 노출되면서 점점 더 복합적인 움직임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워킹 매드 는 원래 버전에 꽤 충실한 편이 다. 지금도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 는 걸 보면,24년이 지난 지금도 창작 당시의 예술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보여준다. 아크람 칸은 지젤 에서 ‘회전 하는 벽’을 통해 계급의 분리를 시각화했다. 반면, 워킹 매드 의 ‘고정된 벽’을 통해 변화를 겪는 건 무용수들이다. 고정된 레단·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 등 클래식 전통을 지닌 극장 기 반 발레단과도 작업했다. 두 유 형의 무용단과의 협업에서 느 끼는 차이가 있나. 확실히 차이가 있다. 각 무용수가 가 진 강점과 약점을 고려해야 한다. 클 래식 발레 기반의 무용수에게 극단 적으로 현대적인 것을 억지로 시키 는 건 의미 없다. 무용수를 제대로 활 용하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매번 그 들이 가진 역량에 맞춰 다른 작품을 만든다. 이 작업이 나에게도 도전이 자 성장의 기회이며 스스로에게 ‘내 가 지금 만들려는 장면의 핵심은 무 엇인가’를 묻게 한다. 내게 클래식 발 레 배경이 있어서 그런 점이 더 수월 한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 세계와도 소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서다. 라벨과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의 음악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 나? 형식적 구조에 기반한 음 악보다는 라벨이나 패르트처 럼 구조에서 자유로운 음악을 좋아하는 듯하다. 이런 음악이 당신의 즉흥성과 잘 맞나? 그렇다. 라벨 ‘볼레로’가 사실상 최초 의 미니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틀 을 주되 그것이 절대적으로 나를 구 속하진 않는다. 볼레로 덕분에 아이 디어를 탐색하는 자유를 얻었다. 서울시발레단 무용수의 캐스 팅 기준에 관해 묻고 싶다. 워 킹 매드 는 순간의 판단, 상체 의 유동성, 불규칙한 무게중심 의 이동 같은, 클래식 발레 무 용수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움직임으로 구성된다. 캐스팅 을 진행하면서 무용수의 어떤 자질을 중점적으로 보았나? 이 작품은 클래식 발레 무용수에게 아주 어렵진 않다. 물론 중심을 낮추 고 몸을 풀 수 있는 조정력은 필요하 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물의 성 격을 찾고 그 안에서 정직한 표현을 끌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중점 적으로 봤다. 서울시발레단이 요한 잉거의 사회 규범에 맞춰 해체·재조 립되는 개인의 몸을 드러내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외부 억압 이 보편화된 시대에서, 이 작품 은 내면의 불안을 외부화한 작 품으로 다시 읽힐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왜 벽인가’라는 문제에 대 한 답을 암시하는 것 같다. 단지 공간 을 나누고 무용수들이 넘나들게 하 는 재미있는 장치였다는 의미 이상 으로, 나는 이 벽이 ‘한계의 사투르 누스적Saturnian 지혜’[‘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등장하는 시간과 질 서, 한계와 구조를 관장하는 신이다] 를 상징한다고 판단한다. 한계는 혼 돈 속에서 형태를 만들어내고, 동시 에 긴장은 바로 그 경계에서 발생한 다. 에로스의 신비에 있어선 더욱 그 렇다. 금지된 것, 경계 지어진 것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스웨덴의 정서나 감성은 어떤 방식으로 안무에 녹였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문화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웨덴 무용 계는 특히 분명한 특징이 있다. 인구 에 비해 땅이 넓은 나라라 연결점이 적고, 현대무용에서 ‘스웨덴 춤의 어 머니’라 불리는 비르기트 쿨베리Birgit Cullberg가 큰 영향을 끼쳤다. 나 역시 그녀의 영향을 받았다. 스웨덴의 안 무에는 땅에 발을 딛는 듯한 투박함, 복잡함을 회피하는 단순함, 어두운 정서가 흐른다. 나는 그것이 전통적 인 민속문화의 영향이라고 생각한 다. 반反바로크적인 예술이랄까. 네덜란드댄스시어터 무용수 시절 예술감독 이르지 킬리안 Jiří Kylián과 일한 경험은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킬리안의 유전자가 내 안에 무의식 적으로 흐른다. 그에게서 계승한 건 파트너링 기술, 공간을 활용하는 능 력, 짧은 작품 안에 본질을 응축해내 는 능력이다. 네덜란드댄스시어터·쿨베리 발레·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시어터와 같은 현대무용 단뿐 아니라, 노르웨이 국립발 46ARCHIVE
49페이지 내용 : 작품을 올리는 자체가 상징적 이라고 본다. 공공성을 기반으 로 하는 제도적 단위에서 ‘해체’ 와 ‘광기’를 주제로 한 현대무용 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내부적 충돌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번 협업에서 ‘경계를 허무는 벽’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내가 판단하기에 서울시발레단 무용 수들에게 워킹 매드 는 극단적인 도전이 되지는 않을 거다. 그들은 이 작품을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는 능 력과 지성을 이미 갖추고 있다. 블리스, 서울과 호흡하며 완성한 작품의 모티프인 키스 재럿의 1975년 ‘쾰른 콘서트’ 실황은 직접 보지 못했을 텐데, 그의 음악 앨범이 아니라 특정 공연 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키스 재럿의 이 음반은 아주 어릴 때 부터 듣고, 늘 곁에 두던 음악이다. 오랫동안 이 곡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너무 존경하는 음악이라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이 곡에 어울 리는 안무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내 안에 그것 을 시도할 수 있는 성숙함이 생겼다 고 느꼈고, 그렇게 탄생하게 됐다. 음악사적으로 재럿의 ‘쾰른 콘 서트’는 재즈이면서도 고전적 구조를 띤다. 블리스 에서는 고전적 형식을 갖춘 형태에서 즉흥성과 흐름이 강조되는데, 이런 점이 클래식 발레와 컨템 퍼러리 발레의 경계를 넘는 시 도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 재럿의 연주는 재즈지만, 클 래식한 틀을 지닌다. 블리스 도 그 런 점에서 닮았다. 음악처럼 즉흥적 인 느낌을 주지만 구조적이고 형식 적인 면도 있다. 그 둘의 경계를 넘나 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발레 에서도 충분히 그렇고, 당연히 그래 야 한다. 전작 카르멘Carmen 2015과 달 리 블리스 에는 특정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신체 의 존재감, 즉흥성, 각자의 리 듬이 더욱 강조된다. 주인공이 없다는 건 모두가 주체라는 뜻 인데,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이전 작품과 다른 무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고자 한 건가. 맞다. 의도적으로 ‘이야기’도, ‘캐릭 터’도 없는 순수한 무용 작품을 만들 고 싶었다. 음악이 이끄는 분위기와 본질만으로 안무를 구성했다. 아주 단순한 무용 작품이지만, 그 단순함 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기존에 대작을 극장 에 위촉해서 제작해온 작가적 행보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고 전을 재해석하는 방식이 아니 라 구조에서 벗어난 ‘해방’, 즉 흥성의 모티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재럿이 이 콘서트를 즉흥으로 연주 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안무적 으로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즉흥 작품은 아니지만 무용수들에게 매 순간 ‘지금 여기에 있는 상태’를 상 기하고 싶었다. 음악, 동료, 공간 자 체에 온전히 반응하며 그 속에서 존 재감을 찾았으면 한다. 춤이 본래 그 런 것이니까. 눈앞에서 형체를 이루 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붙잡을 수 없지만 강렬한 경험. 당신이 추구하는 예술가적 관 점은 전능한 저술가가 아니라, 무용수들과 의미를 만들어가 는 협업자에 가깝다. 즉흥성과 관계성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 니 기존 작품의 재현이 아니라 서울에서 만난 무용수들과 함 께 새롭게 살아 움직이는 생생 한 작업이 돼야 할 것 같다. 서 울시발레단 버전의 블리스 는 어떤 방식으로 기존 작품과 차별을 이루게 되나. 맞다. 이 작품은 정해진 아카이브를 재현하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 만난 무용수들과 호흡하면서, 함께 만들 어가는 살아 있는 작품이 되기를 희 망한다. 무용수들 각각의 반응, 감 정, 존재가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호흡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래서 매 공연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고, 그게 이 작품의 핵심이다. 궁극적으로는 무용수 ·안무 가·관객 모두를 ‘초심자’의 상 태로 되돌리려는 듯하다. 권위 를 내려놓고 새로운 것에 열려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 태도는, 동시에 신작을 끊임없이 창작 해야 하는 안무가로서의 압박 감을 반영한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열린 마음과 호 기심을 가진 채 늘 ‘초보자’로 남고 싶 다. 이런 상태를 유지한다면 우리 모 두가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 알고 있다’ 혹은 ‘아는 척’하는 태도야말로 예술에 있어 가장 해롭 고, 일종의 암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순수하게 드러내느 냐에 따라, 진정한 배움과 성취가 가 능하다. 서울시발레단 워킹 매드&블리스 2025 ∕05 ∕09—05 ∕18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안무요한 잉거 객원 수석이상은 choreographer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