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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페이지 내용 : 20세기를 위한32대의 자동차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조용히 연주하라 포스터 06 PIONEER OF THE KOREAN ARTS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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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페이지 내용 : 최초의 한국 뮤지컬은 1966년 예그린 악단의 살짜기 옵서예 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학계의 의견은 분 분하다. 일제 강점기 반도가극단이나 라미라가극단이 올린 향토 가극을 한국 뮤지컬의 원류로 삼는가 하면, 살짜기 옵서예 이전에 올린 극단 제3극장의 새우잡이 1965, 카니발 수첩 1966을 효시로 보기도 한다. 이 외에도 드라마 센터에서 유치진이 올린 포기와 베스 1962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6년 살짜기 옵서예 를 첫 뮤지컬로 보는 이 유는 뮤지컬 양식을 제대로 구현하고,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이후 예그린악 단의 뮤지컬 스타일을 정립했기 때문이 다. 1960년대는 전후 사회가 복구되기 이전이었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 다. 4.19 혁명 이후 5.16 군사정변이 이 어졌고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한편, 장기 독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 워졌다. 그렇다면 호화로운 대중문화의 꽃인 뮤지컬이 어떻게 1960년대에 탄 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한국 뮤지컬 시작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일제 강점 기부터 이어진 악극과 가극에서 뿌리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복 이후 서 구 문화가 범람하던 분위기에 편승해 외 래문화를 토착화하려던 움직임에서 찾 는 것이다. 예그린악단의 뮤지컬은 이 전에 유행한 음악극인 악극과는 거리를 뒀다. 예그린악단의 단장을 맡은 박용 구, 대춘향전 의 작곡가이자 이후 국 립가무단 단장이었던 김희조 역시 악극 단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예그린 악단 초기 멤버 중 악극과 인연 있는 멤 버들이 있었지만, 단원은 악극 배우가 아닌 성악과나 무용과 출신으로 구성했 다. 워커힐 쇼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 던 최창권이 음악을 책임졌으며, 성악 과 출신의 나영수에게 합창 지휘를 맡겼 다. 예그린악단을 이끈 박용구는 예그 린악단의 작품을 “예그린 뮤지칼”이라 고 명명하며 ‘뮤지컬’ 제작이 예그린의 정체성임을 명확히 했다. 유인경이 쓴 ‘한국 뮤지컬의 세계’2009 에서는 초창기 한국 뮤지컬이 탄생할 시 기의 시대적 상황을 상세하게 정리했 새로운 장르 ‘뮤지컬’을 시도하다 다. 1950년대 중반까지 전후 급속히 인 기를 얻은 여성국극과 악극은 영화와 TV 영상 매체가 인기를 얻으면서 빠르 게 쇠락했다. 한편 1960년대에 라디오 와 TV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대중문화 시대가 열렸다. 1950년대부터 애니여 총을 잡아라 1955 이하 국내 수입 연도 , 칠인의 신부 1956, 쇼보트 1956, 왕 과 나 1957, 아가씨와 건달들 1959, 남 태평양 1961, 오클라호마 1962 등 브로 드웨이 뮤지컬 황금기 시절에 제작된 뮤 지컬영화가 국내 소개됐다. 한편, 한동안 국내 상주한 미8군에 영향 을 받은 다양한 미국 문화가 한국에 전 파되기도 했다. 미군을 위한 소위 구락 부 클럽 를 통해 재즈가 국내에 퍼졌다. 패티김·윤복희·한명숙 등 미8군 무대 를 통해 데뷔한 가수들이 해외 공연을 다니는 등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 다. 이들 중 서구적인 외모와 허스키한 보이스가 매력적인 패티김은 살짜기 옵서예 초연 무대에 애랑 역으로 참여 했다. 오늘날 뮤지컬 스타 캐스팅의 원 조였던 셈이다. 1960년대 예그린악단 의 주체들이 ‘뮤지컬’을 정체성으로 삼 은 이유는 당시 대중 사이에 미국 문화 에 대한 동경이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 이다. 극장에 걸린 예그린악단의 공연 현판 예그린 뮤지컬 제2회 앙코르 공연 살짜기 옵서예 홍보물 PIONEER OF THE KOREAN ARTS history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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