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페이지 내용 : 벽, 언제나 그 너머를 그리는 무대 위, 흐트러진 무리가 일렁인다. 붉은 고깔을 눌러쓴 사람들이 무대 를 돌며 시선을 분산한다. 이들의 몸 짓은 규칙을 비껴나가고, 가시처럼 튕기며 맺힌다. 이내 고깔 쓴 이들이 사라지고, 검은 중절모를 쓴 이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벽을 따라 배회하 고, 무대는 불규칙한 파동의 진원지 가 된다.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는 움직임, 한 줌 모래처럼 집중을 가로 채는 장면들. 시야는 무너지고, 인식 은 흐트러진다. 무대 중앙에 놓인 벽 앞에서 춤추는 몸들이 찢기듯 갈라지고, 사라지듯 흩어진다. 단절된 몸짓은 파편화된 거울 조각처럼 빛난다. 익숙함과 낯 섦이 교차하는 감각의 반복. 요한 잉 거Johan Inger의 워킹 매드Walking Mad 는 이 불협과 변주 속에 수수께끼를 남기지 않는다. 오래된 벽지의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처럼 서늘하 고 섬세한 진동이 무대와 객석을 흔 든다. 서로 다른 몸들이 충돌할 듯 교 차하고, 각기 다른 정동이 무대를 스 친다. 벽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다. 공간은 벽의 개폐에 따라 수축하고 팽창하 며, 문은 때로는 통로가 되고 때로는 장벽이 된다. 벽은 무대에 경계를 긋 는 프레임이자 관점의 중심축이다. 그 앞에서 무용수들은 서로의 그림 자로 진동한다. 군무 안에서 익명화 된 몸들은 독무에서 분열하는 주체 로 갈라진다. 요한 잉거는 작품의 제목과 모티프 를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끌어 왔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좋은 것들은 광기에서 시작된다.” 사랑 에 로스 은 그 광기의 이름이며, 그리움 은 현실의 경계를 긋는 칼날이다. 우 리는 이성의 성벽 안에 갇힌 채 살아 가지만, 동시에 유토피아를 향한 충 동—무의식의 파동 속에 사는 존재 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를 ‘아토포스atopos’ 즉, 위치 지을 수 없는 자라 부른다. 이성의 지도로는 그려지지 않는 존재. 안무가는 이 무 정형의 자리에 벽을 세운다. 그러나 벽은 언제나 그 너머를 부른 다. 발을 떼기 전, 우리는 낯섦을 응 시해야 한다. 불안은 그 순간에 깃든 다. 그리고 라벨 ‘볼레로’가 흐르기 시 작한다. 점차 고조되는 리듬, 반복되 는 패턴, 심장을 대리하는 진동. 마침 내 맥동은 몸을 압도하고, 광기의 파 장은 무대를 휘감는다. 음악이 절정에 이르자 벽은 무너지 고 무용수들은 뒤엉킨다. 분리된 공 간이 해체되며 하나의 군무를 이룬 다. 그 순간, 광기의 볼레로는 멈춘 다. 정적. 다시 벽은 객석을 향해 조 여든다. 그 틈에 갇힌 여성 무용수와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세 명의 남성 무용수. 잔향처럼 흐르는 ‘볼레로’는 오르페우스의 노래처럼 아득하다. 측면에서 투사된 조명이 벽을 스크 린으로 바꾸고, 몸의 그림자들이 교 차한다. 그림자는 얼굴 없는 존재로서 몸을 투사한다. 여자와 남자의 그림자가 포개질 때 두 몸은 서로에게 기대고 얽히지만, 그 만남은 다시 벽에 가로 막힌다. 벽은 공간의 경계이자 관계 의 저항이며, 감정의 제동이다. 몸들 은 벽을 향해 달려가고, 밀치고, 부딪 히고, 쓰러지지만, 벽은 쉬이 열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자리를 떠난 이들 의 외투만 남아 있다. 그 자리에 남 녀가 들어선다. 사라진 몸들의 잔여, 기억의 껍질들. 그리고 아르보 패르 트 ‘알리나를 위하여’가 흐른다. 흔들 림 없는 침묵 속에서 무대 위의 벽은 묵직하게 존재한다. 그 벽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벽은 외면을 비추 는 동시에 내면을 드러낸다. 그림자 들은 더 이상 얼굴을 갖지 않는다. 벽 앞에 홀로 남은 무용수는 무대에 남 겨진 옷과 상흔 위에 자신의 존재를 기입한다. 워킹 매드 는 아토포스, 곧 위치 지 을 수 없는 장소를 펼쳐 보인다. 걸음 은 같은 자리를 도는 듯하지만, 매번 다른 지점을 통과한다. 윤환하는 리 듬, 벽을 향해 뻗어낸 발끝, 하늘을 밀어낸 손바닥, 차오르는 광기. 스네 어 드럼의 파형에 흔들리는 몸은 마 리오네트처럼 기이하고도 애처롭 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경계 위에, 패 르트의 여백 속에서 광기가 깨어난 다. 우리는 객석에서 ‘좋은 것들’이 시 작되는 걸음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좋은 것들의 다른 이름은, 아마도 지복bliss일지 모른다. 모든 것이 사라진, 그렇기에 가능한 더블 빌 중 두 번째로 선보인 블리 스Bliss 는 무대 중심을 향한 응시를 유예한 채 주변을 따라 조용히 흘러 간다. 무용수들은 등을 돌려 시선을 객석이 아닌 서로에게 향한다. 그 눈 빛은 퍼포먼스의 과시가 아니라 허 공에 스며든 파동처럼 흩어진다. 이 들은 보여주기보다 흐르기를 택한 다. 중심이 사라진 풍경, 정면조차 불 분명한 그 무대는 응시의 질서를 교 란하며, 응시를 통해 조직되던 감각 의 구조를 무너뜨린다. 이때 무대는 더 이상 장소로서의 무 대가 아니다. 어느 곳도 아닌 ‘무장소’ 이며, 뿌리내리지 못한 존재들이 부 유하는 감각의 지층이다. 안개 낀 숲 처럼 경계는 흐릿하고, 구조와 감정, 중심 없이 리듬만이 공간을 가로지 른다. 충동이 언어보다 앞서고, 몸은 그 언어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한다. 감정 이전의 기척, 안무 이전의 떨 림. 춤은 기술이 아니라 감응의 여백 에 깃든다. 그것은 모든 형상이 사라 진 지점에서 생겨나는, 말해지기 이 전의 세계인 지복점bliss point을 겨냥 한다. 그러나 블리스 는 단순히 불안과 낯섦의 공간을 무대로 설정하지 않 는다. 안무가는 그 불안 너머의 결을 천천히 직조해낸다. 뚜렷한 좌표 없 이 부유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존재 를 쉬게 하는 몸. 고정된 정체성과 유 용함이라는 근대적 명목을 잠시 유 예하며, 존재의 틀을 벗어난 시간 속 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것은 역할 도, 의무도, 도달할 목적도 없이 그저 머무는 몸의 상태다. 뙤약볕 아래 어 쩌다 만난 그늘처럼, 블리스 는 존 재를 ‘멈추게’ 하고 그 멈춤 속에 작은 쉼을 마련한다. 요한 잉거의 춤은 그 쉼을 몸으로 말 한다. 언어보다 느리고, 서사보다 가 볍게. 무게를 덜어낸 몸은 바람에 실 린 꽃잎처럼 흩어지며, 서로를 따라 가거나, 멈추거나, 다시 흐른다. 리 듬과 맥박, 공기와 그림자가 얽히는 이 공간에서 감각은 새롭게 깨어난 다. 장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존재 하는 방식이 변화한다. 이 전환이야 말로 안무가가 말하고자 한 진짜 ‘춤’ 이며, 그것이야말로 존재가 스스로 를 다시 쓰는 순간이다. 지복점은 충만함이 아니라, 그것이 도래하기 직전의 정적이다. 아무것 도 없기에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무 수한 시작이 거처하는 자리. 춤은 그 백지의 시간을 가리킨다. 춤은 단지 움직임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이며 감각의 문법이다. 그것은 우리 안의 잊혀진 시간을 불러내고, 우리가 지 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다. 말없 이, 그러나 깊게. dance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