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페이지 내용 : 이하느리가 마주한, 선택할 수 없는 순간들 글. 신예슬 음악평론가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앨범, Selected Ambient Works 85- 92 1992을 다시 한번 기억해보자. 사 소한 소리와 패턴의 모음, 우연히 녹 음한 것 같은 소리가 즐비한 이 앨범 은 아주 소박한 단편들을 특별한 무 언가로 듣게 하는 음악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명반이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의 작업물을 큰 뜻 없이 모아둔 것처럼, 앨범 제목도 그저 담 담하다. 작곡가 이하느리와의 대화를 소개 하기에 앞서, 에이펙스 트윈이 지 금으로부터 40여 년 전부터 포착해 온 소리를 담은 앨범을 이야기하는 건, 이번 이하느리의 신작이 그 앨 범의 어떤 구석과 닮았기 때문이다. 2025년 6월 26일 서울시국악관현 악단이 연주하는 그의 신작 제목은 ‘Unselected Ambient Loops 25- 25’. 장장 40여 분에 달할 그의 신작 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다른 장면 들도 스멀스멀 나타난다. 시의 내 용과 관계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이전작 ‘All the mud and grease attracts the truth I’2024 또한 황병 승의 시 ‘모든 진흙과 윤활유가 진실 을 끌어당기는군’에서 따온 제목이 었다. 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 이, ‘Round and velvety-smooth blend’2025는 우연히 발견한 음료 제 품에 붙어 있던 문구고, 자신의 영 문 이름 마지막 자에 ‘j’를 끼워 넣은 건 체코 작곡가 온드레이 아다메크 Ondrˇej Adámek처럼 ‘j’로 끝나는 이름이 멋있어 보여서라는 이야기도 뇌리를 맴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음악가’ 혹은 ‘작 곡가’ 둘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냐고 묻 는 말에 아직 ‘학생’이라고 답하는 이 하느리는 정말이지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젊은 작곡가다. 내가 생 각하기에 젊은 작곡가를 바라볼 때, 그가 만든 곡만큼 흥미로운 건 지금 어떤 것들을 관찰하는지, 그를 둘러 싼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를 살펴보는 일이다. 앞으로 그가 펼 쳐나갈 어떤 미래의 씨앗이, 어쩌면 이제 막 그가 발견하기 시작한 것 속 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하느리의 이번 신작과 최근 그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간단히 묻고 답한 짧은 대화의 기록이다. 곡 제목에서 ‘unselected’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작곡가 는 대체로 무언가를 선택해야 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기 마련 인데, 그런 맥락에서이 단어를 은근한 긴장 속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Unselected Ambient Loops 25-25’에 들어갈 아이 디어들을 선택할 때, 중요한 구 심점이 된 건 무엇이었나요? 이 곡에서 ‘unselected’라는 말은 단 순히 선택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을 모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 의 제한된 국악 경험치와 접근 가능 한 정보의 범위 안에서, 처음부터 선 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선택한 게 아 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로 이뤄진 곡입니다.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상태에 가까웠 고, 이 점이 작업의 출발점이자 구심 점이었습니다. 저는 ‘루프’라는 개념의 기본 꼴 을 순환고리에 갇힌, 기계적인 무한 반복으로 이해합니다. 한 편 이번 곡에서 루프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것 으로, 그 개념이 한층 유연해지 는데요. ‘루프’는 어떤 방식으 로 반복/변화할까요? 이 곡에서 루프는 ‘기억’에 더 가깝습 니다. 희미해지고, 찌그러지고, 새로 운 맥락에 뒤섞이면서도, 완전히 사 라지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 들리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는, 그 자체로 기계적이라기보단 생물 같은 반복입니다. 원형은 남아 있지만, 계속해서 그 자리를 옮기는 방식으로요.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제가 들 은 많은 국악관현악 곡이 장 단의 주기가 짧아지고 빨라지 며 끝맺는 경향을 보입니다. 40분가량의 이 대곡이 이어지 는 동안, 어떤 흐름이 형성될 까요? 더불어 저는 국악관현 악 곡을 들으며 굉장히 드라마 틱한, 감정적인 몰입 상태를 경 험해왔고 그것이 때로는 살짝 버겁기도 했는데요, 그런 점에 서 ‘Unselected Ambient Loops 25-25’라는, 제목의 느슨한 상 태가 꽤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 습니다. 어떤 ‘국악관현악 곡’ 을 만들고 싶었나요? 45분이라는 시간은 저에게 ‘길다’는 느낌보다, ‘두께가 있다’는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흐름보다는, 공간의 밀도나 명암이 바뀌는 식의 흐름이 생기도록 했습 니다. 점점 빨라지거나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구조보다는, 특정한 파편 이 반복되며 시간이 축적되는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결과적인 소리 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이번 작품은 국악이라는 어휘로 전혀 다 른 문장을 써보려는 시도였습니다. 느슨하고, 흐릿하고, 선명하게 고조 되지 않는 방식으로요. 국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의 손 과 귀에 익은 감각은 양악기를 다뤄온 이들의 감각과 꽤 다릅 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 도, ‘음’과 ‘소리’를 대하는 태도 도 같지 않고요. 그런 사실이 작곡 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반영하려고 노력은 해 봤습니다. 국 악기 연주자분들의 시간 감각이나 소리에 대한 태도에 대해 스스로 인 식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걸 작곡에 적용하려고 하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 히려 그런 의식이 계속 방해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결국은 연주자에 대 한 이해보다는, 제가 다루려는 재료 에 더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 게 됐습니다. 곡을 쓰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무엇이고, 가장 많 이 변한 건 또 무엇이었나요? 변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루프’입니 다. 가장 많이 변화한 건, 사실 거의 없습니다. 이 작업은 처음부터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처음 세팅한 조건을 믿고 끝까지 밀 고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 어요. 과정 내내 뭔가를 새로 바꾸기 보다는, 처음의 불완전한 설정을 유 지하면서 그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 으로 작업했습니다. 이 곡을 쓰면서 제일 재밌던 순 간은 언제였나요? 끝세로줄을 그은 때인 것 같습니다. 50ARCHIVE
53페이지 내용 : 서울시국악관현악단 Re-프로젝트 장단의 재발견 2025 ∕06 ∕26 | 세종문화회관M씨어터 지휘 최수열 프로그램 ➊ 합주곡3번 김희조 작곡 ➋Unselected Ambient Loops 25-25 이하느리 작곡 | 위촉 초연 가장 손에 익은 악기는 무엇인 가요? 이 곡을 마무리하고 다 음 작업을 하고 있을 지금, 가 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악기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익숙한 피아 노와 바이올린이 손에 익습니다. 이 번 국악관현악 작업을 마무리하고 곧바로7월3일 최수열의 밤9시 즈 음에 공연에서 초연할 ‘As if.......I’ 마감 준비로 넘어갔습니다. 이 작품 에서는 콘트라바순이 꽤 중요한 역 할을 맡고 있어서, 요즘은 그 악기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입니다. 곡을 쓰는 건 순수하게 소리를 발현하는 일인가요, 음향적 사 건을 일으키는 퍼포먼스를 만 드는 일인가요? 소리와 공연 중 기본값처럼 더 중요하게 자 리잡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 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엔 ‘소리’ 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 만, 작업할 때나 관심을 가지 는 대상들을 보면 그 경계가 꽤 모호합니다. 어떤 작품 은 소리에 훨씬 집중하게 되고, 어떤 작업은 오히려 사건이나 맥락이 더 중요해지 기도 하니까요. 아직 명확한 기 본값을 설정하기보다는, 그 애매한 지점에서 계속 머무르려는 상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최근 자주 반복해서 들은 음악 이 있거나 집요하게 떠올린 소 리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요즘은 하세가와 하쿠시Hakushi Hasegawa의 음악에 푹 빠져 있습니다. 제 음악과 전혀 접점이 없는 결의 작 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더 충 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제가 다루지 않는 언어, 다룰 수 없을 것 같은 감각이 너무나 자유롭게 흘러 나오는 걸 들으면, 부럽기도 하고 자 극도 많이 됩니다. 흥미롭게 읽은 한국 시집 한 권 과 그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추천해주세요. 시집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니어서 ‘팬’ 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함기석의 ‘오 렌지 기하학’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 다. 문학적인 감동이 있었다기보다 는, 읽다보면 이상하게 아이디어가 샘솟는 책이었어요. 음악적인 것과 는 전혀 다르지만, 사고의 방향을 다 른 쪽으로 틀어주는 힘이 있어 자주 펼쳐보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른 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conversation51